꽤 높은 곳에서 떨어져 버렸는걸.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정신없이 구른 덕분에 긴 그녀의 갈색 머릿결이 엉망이었다. 잔가지하며, 떨어진 나뭇잎까지. 그녀가 지금 있는 곳이 꽤나 깊숙하고 외진 숲속이라는 것을 쉽게 파악할 수가 있었다. 아야야…. 아주 살짝 몸을 움직여 본 건데도 온 몸 구석구석 성한 대가 없는 듯 아파왔다. 가장 큰 고통이 따르는 발목은 안 봐도 이미 퉁퉁 부어있을 것처럼 아려오는 바람에 저절로 깊은 한숨이 나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고. 그나저나, 진짜 큰일이네. 겉으로 봤을 때는 다행이 자잘한 긁힌 상처 말고는 큰 상처는 보이지 않는다. 불행 중 다행인가 싶은 타이코는 크게 걱정할 정도로 다치지는 않은 듯 해 안도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지만.
“하필 다리를 다칠게 뭐야….”
움직이기도 버거운 발목 때문에 꼼짝도 할 수가 없는 처지가 낭패였다. 여기가 현실세계라면 그것도 그거 나름대로 문제긴 하지만 지금은 더 여러 의미로 위험하달까. 이제는 어엿한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된 후배들과 함께 오랜만에 순찰 겸 디지털월드에 소풍으로 놀러 온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나, 타이코는 두 번째 한숨을 내쉬었더라.
“핸드폰도 소용없을 테고… D터미널도 놓고 왔는데….”
아주 가관이다, 가관. 저절로 신음이 세어 나올 정도로 상황은 좋지 못했다. 숲 한복판에 파트너 디지몬도 없이 지금 이 상태로 디지몬이라도 나타난다면…. 으으, 정말 생각하기도 싫다. 타이코는 주변을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살펴보았다. 다행히 쥐 죽은 듯이 고요하기만 한 숲은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처럼 언제 또 갑자기 툭 튀어나와 습격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뭐 본래부터가 그런 곳이니까 디지털월드는. 그래도 소풍으로 놀러왔다가 저만 아이들과 떨어지고 언제 위험에 빠질 지도 모르는 지금 같은 상황이 그다지 좋다는 건 결코 아니라는 거. 타이코는 이대로 가만히 아이들을 기다릴 수는 없다는 생각에 물 밀 듯 몰려오는 통증에도 인상을 확 찡그리며 꾹 참아내고는 움직여 보일 찰나였다.
파스슥―.
움찔. 인기척을 드러내는 수풀 소리에 경직된 그대로 얼어붙은 타이코는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잘못 들린 거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또 한 번 파스슥, 흔들리는 수풀에 잔뜩 긴장한 시선으로 응시하는 도중 길도 없는 수풀 사이를 헤쳐 나오는 인물에 타이코는 멈칫해 보인다. 익숙한 금발 뒤로 다소 다급해 보이는 새파란 눈동자. 그보다 먼저 앞장서서 걷고 있던 붉은 눈동자 역시. 타이코는 순식간에 밝아지는 얼굴로 소리쳤다.
“야마!”
“이 바보가!!”
“익…….”
갑작스런 호통에 반사적으로 움찔거린 타이코가 당황한 기력이 여릿한 얼굴로 그와 마주한다.
-구간 "A Nightmare" (재판 판매 완료)
야마타이,피에타이 / 무선제본 / a5 / 88p
Prologue 中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바다. 잔잔히 물 흐르는 파도소리와 함께 불어오는 바람이 살며시 뺨을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스쳐지나 갔다. 새파란 바다.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까지 아름다운 색을 뽐내며 눈앞에 펼쳐져 있는 바다는 이상하게도 짠 내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타이치는 문뜩 떠올렸다. 아, 꿈이다. 꿈이구나. 새하얀 모래사장 위에 오도카니 서 있는 타이치는 멍한 시선으로 모든 것이 부자연스러운 기운을 품고 있는 것들을, 포근한 갈색 눈동자로 느릿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근데 조금… 희한한 꿈이네.”
이런 걸 자각몽이라고 하던가. 꿈속에서 이것은 꿈이다 하고 깨우치는 꿈을 그리 많이 접한 일이 없었던 타이치로서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여기가 말로만 듣던 꿈속 세계인가.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던 탓에 보기 꽤나 힘들었던 호기심 어린 얼굴이었다. 마치 그 여름날의 모험을 떠났던 어린 시절의 모습 그대로, 신비하게도 꿈을 꾸고 있는 상태임에도 제 뜻대로 움직이고 생각하는 꿈속에서의 타이치는 또 다른 모험을 떠나는 기분으로 몸을 움직여보았다.
모래가 밟히는 사그락 소리. 시원하게 파도치는 물소리가 정말로 현실과 다를 게 없어서 타이치는 간만에 들뜬 마음으로 한참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을 즘이었다.
Rrrr…. Rrrr….
어, 이 소리는. 희미하게 제 귀에 들려오는 소리에 타이치의 발걸음이 서서히 멈춰 섰다. 분명 단순한 꿈일 텐데 너무나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소리에 자연스레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한 전화벨소리의 귀를 기울였다. 다시금 제 존재를 알리려는 듯 크게 들려오는 소리에 이끌리듯 타이치의 시선이 일순 어느 방향에서 멈춰 서 그곳을 향해 시선을 멀리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