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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디지몬] Dream

[야마타이] Dream .05

by ㅁㅣ리내 2021. 3. 23.

 

2002. 12. xx 겨울

 

 

‘어, 근데 그 거 신곡이라며. 내가 먼저 들어봐도 되는 건가?’

갑자기 불려온 탓에 유니폼 차림 그대로 문뜩 떠오른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타이치는 기타 음향을 체크하고 있던 그에게 물었다. 같은 밴드 부 일원도 아니고 제일 먼저 제 3자인 자신이 먼저 들어도 되느냐 그리 묻는 말에 고개를 드는 야마토는 저를 따라 고개를 기울이며 당연한 얼굴로 담담히 말한다.

‘안될 게 뭐 있어.’

도리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싶은 말투에 타이치는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진 말 임에도 입 꼬리가 절로 올라가버렸다. 네가 그렇다 한다면 다 그럴 것만 같아서.

야가미 타이치는 ‘디지몬’ 이라는 특별한 인연으로 이시다 야마토에게서 우러나오는 신뢰… 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까, 새삼 굳게 자리 잡고 있는 둘의 관계가 새삼 돌이켜 보게 된다. 3년. 선택받은 아이로서 디지털월드를 구하고 무더웠던 그 여름날의 모험을 끝낸 이후 3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시간동안 이어져 온 관계로부터 생겨난 여러 추억들을 회상한 타이치는 화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한층 더 들뜬 목소리였다.

‘음― 그럼 어디 한 번 신곡 잘 들어보겠습니다.’

장난스러운 제 말에 야마토 역시 미소를 머금고 자세를 잡았다. 멋들어지게 분위기를 잡고 나름 진지한 얼굴로 기타를 연주하는 소리가 잔잔한 걸 보아 이번에 나온다는 신곡은 신나고 활기찬 쪽은 아닌 듯 했다. 솔로곡이라고 했으니…. 음… 발라드 쪽인가.

음악으로는 영 소질이 없는 타이치었기에 물 흐르듯 부드럽게 주변 공기에 녹아드는 기타소리에 한 번. 그와 함께 하모니를 이루는 목소리가 마음 속 깊이 와 닿을 정도로 감명 깊게 들려와 타이치는 또 한 번 감탄했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선율에 타이치는 기타소리에 맞춰 흐르는 이번 신곡에 금방 빠져들었다. 여심을 충분히 흔들고도 남을 목소리가 간드러지게 제 귀에 닿아올 때마다 타이치는 그가 부르는 노래에 흠뻑 젖어 들며 감상했다.

후반부에 들어가면서 느리지만 확실하게 무언가를 전하고자 하는 노래는 이내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듣고 있던 타이치를 흠칫 떨게 만들었다.

‘이 노래…….’

포근한 갈색 눈동자가 흔들리는 시선으로 노래에 집중해 저를 보지 않고 기타로 향해 있는 그의 얼굴을 응시한다. 그것도 잠시, 타이치는 무심코 그의 얼굴에서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그대로 계속 보고 있어서는 안 될 거 같아서였다. 야마토가 지금 부르는 노래 가사가 무슨 내용이지 깨닫자마자 가슴 한 구석이 찌르르 하고 뒤숭숭해져서는. 왠지 모를 심장소리가 빨라진 거 같은 느낌도 들고 더하면 제 얼굴이 홧홧해질 거 같아 노래에 집중하고 있는 야마토의 모습을 타이치는 바라볼 수 없었다. 그 뿐이었다.

하아…. 뭔지 몰라도 일단 진정하자.

야마토가 저런 노래를 부르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왜 이런담. 습격 아닌 습격-적어도 지금 이 순간 야가미 타이치가 생각지도 못했다는 점에서 이 표현은 어느 정도 유효하다-에 타이치는 지금 저가 힘껏 굳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어깨에 바짝 들어간 힘을 풀어냈다. 늦게나마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속으로 심호흡을 여러 번 내뱉으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야마토가 부르는 노래에 타이치가 집중한다.

생각보다 애절하네….

야마토의 신곡 노래를 들으면서 가장 절절하게 느낀 점은 그랬다. 그가 부르는 가사들이, 사랑을 노래하는 말 한마디 하나하나를 주워 담을 때마다 타이치는 밤에 연인의 집 창가에서 악기를 연주하여 불렀던 사랑의 노래, ‘세레나데’처럼 가사 그대로 새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 머릿속에 떠오른 연인의 모습이 쉽게 상상되었다.

 

 

♪ 사랑해서는 안 될, 가져서는 안 되는 마음을 가져버린 내가 여기 있어. 이미 마음이 부서질 만큼 아프고 괴로워도 너를 향한 이 마음은 정말로, 정말로 그 무엇보다도 소중해서 포기하지 못할 거 같아. 네가 봐주지 않더라도 언젠가 도망치지 않고 용기를 내어 너에게 다가가 이 마음을 전할 날을 기다려줘. 그때까지 항상 네 곁에 있을 게―. ♬

 

 

노래 가사들을 들을수록 타이치는 그저 묘했다. 어렴풋이 세레나데는 낭만적인 사랑의 노래라는 이미지가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리도 애절하고 슬픈 세레나데도 있을 수 있구나 싶었다. 그러다 문뜩 깊고 깊은, 저도 모르는 심연이 있는 곳까지 강렬하게 파고드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래서일까 쿵쿵거리는 심장소리, 누군가를 향해 애절한 마음을 담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야마토의 노래에 조금씩, 빠르게. 설렘을 느끼고 있음을 의식한다.

조금은 특별한, 일상적인 나날들 속에서. 남모르게 행복을 누리며 아무렇지 않게 지내왔던 일들이 한순간에 바뀌게 된 시작점이었다. 운명이라는 이름에 수레바퀴가 도르르- 거침없이 움직이기 시작한 날이었고, 어쩌면 둘 사이에 변환점이 되는 날이었으며, 인생의 갈림길이었음을, 두 사람은 아직 알지 못했다.

 

* * *

 

해가 거의 지고 나서야 하교하는 두 사람은 제법 피곤한 모양인지 학교를 나선 이후부터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타이치의 모습에 야마토는 괜스레 미안해졌다. 안 그래도 몸을 격하게 움직이는 부 활동 때문에 힘들었을 그를 늦은 시간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잡고 있던 탓에 괜히 더 힘들게 해버렸나 싶어 쓰게 웃어보였다.

이번 신곡은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이브 날 공식적으로 선보일 큰 무대에서 처음 노래할 곡이었다. 그것도 야마토가 간만에 머리 쥐어짜내서 직접 작사, 작곡한 곡으로 맨 마지막 라스트를 장식할 앵콜곡으로 사전에 멤버들과도 결정이 이미 끝난 상황. 그래서 더욱 신경 써서 완성했거늘 타이밍이 좋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멤버 전원이 개인사정으로 먼저 가 버려서 불러다 잡아 세울 수도 없고 하지만 노래 소감은 들어야겠고 해서 급히 부른 사람이 타이치였다. 마침 그가 부 활동을 끝내고 집에 갈 시간이라 판단하고 연락했더니 지금 막 끝났다고 답하는 그에게 야마토는 바로 동아리실로 와 줄 수 있느냐 물었다. 타이치는 흔쾌히 승낙해주었다.

솔직하고 담백하게 저가 원하는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이들 중에서 타이치는 고맙게도 야마토가 원하는 소감들을 원 없이 들려주었고 그에게 받은 피드백을 토대로 몇 가지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작업에 빠져있는 사이 어물쩍 들려오는 소리와 타이치가 가리킨 시계를 확인한 야마토는 그제야 시간이 꽤나 훌쩍 흘러가 있음을 알고 피곤하지만 마냥 흡족한 얼굴로 돌아가자 말했더랬다.

‘…오늘 시간 내줘서 고맙긴 한데 걸으면서 자지는 마라.’

그러다 넘어진다. 꾸벅꾸벅 조는 모양새가 아무래도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거 같은 사람처럼 휘청거리는 고갯짓이라 야마토는 더 더욱 어쩔 수 없는 미안함이 들었다. 이를 눈치 챘는지 것도 아님 걱정 가득한 제 말에 반응한 건지 졸려서 풀린 듯 해 보이는 타이치의 갈색 눈동자가 마주해 오는데 마치 제게 미안해하지 마라, 괜찮다는 말을 대신하는 듯해서. 야마토는 기운 빠진 얼굴로 힘없이 웃어 보이는 그의 얼굴에 여지없이 그를 따라 웃어 보이며 눈가를 비비는 타이치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려 조금만 버텨, 집도 가까우니 금방 가잖아. 하고 말을 걸며 최대한 그가 졸음에서 헤어 나올 수 있게끔 도와주었다.

잠에서 깰 수 있도록, 사소한 이야깃거리로 신경 써서 계속 말을 걸어주고 있는 야마토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조근하게 들려왔다. 단순히 졸린 건지 아님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느라 남아있던 기운 몽땅 써버려서 녹초가 된 것인지 –정작 본인은 직감적으로 후자임이 크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아하지만- 몽롱한 기분 속에서 방금 전까지 잠기운에 잠잠했던 가슴 한 구석이 또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애써 담담한 척 미소로 가려보이는 타이치는 제 앞에서 아름다운 세레나데를 불렀던 노래 가사를 떠올리게 만들어버리는 감미로운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혹시라도 지금 저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챌까 봐서. 애써 졸려함을 기회삼아 중얼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꼬박꼬박, 말을 걸어오는 그에게 대답해주었다.

타이치가 굳이 티를 내지 않아도 오늘은 유난히 피곤한 하루였다. 평소보다 많은 연습시간을 가진 터라 몸이 노곤 노곤해 있었는데 그의 신곡을 별 생각 없이 들어준다는 게 예상치 못한 사랑을 속삭이는 슬픈 노래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설레는 마음을 감추느라 온 신경을 곤두세웠던 탓에 타이치는 남아있던 체력을 온전히 그 곳에 다 쏟아 부우고 온 것만 같았다. 차라리. 차라리…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시원시원하고 망설임 없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노래였다면. 지금처럼 묘한 기분이 들면서 의아해하고 뒤숭숭한 감정이 들었을까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

사랑해서는 안 될, 가져서는 안 되는 마음, 이라….

타이치에게 있어 어쩌면 유난히 신경 쓰이게 하는 그 가사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떠오르기를 반복해나갔다. 왜인 걸까. 물론 가사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서글프고 슬픈 생각이 들게 하는 구절이었다. 하지만 타이치는 그 구절이 결코 자신과는 상관이 없음이 분명한데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 이상하다면 이상했다. 확실한 이유도 모른 채 갈팡질팡, 길 잃은 아이처럼 제 뜻과는 상관없이 동 떨어진 기분이나 감정들이 자신을 이리도 지치게 만들어버렸나. 무거워지는 눈꺼풀에 짓눌려 또다시 눈을 감는다. 걷고 있는 두 발도 금방 힘이 빠질 듯 했고 가방끈을 잡은 손 또한 점점 느슨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집에 가서 자.’

‘…으응.’

이제는 눈을 뜰 생각도 안하고 터벅터벅 힘겨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타이치를 바라보는 파란 눈동자에도 피곤함이 물씬 보이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오늘따라 축 져져있는 타이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그에게서 전염되기라도 한 듯 느끼지 못하고 있던 피곤함과 노곤함이 갑작스레 몰려와 피식 웃어 보이는 야마토는 가까스로 졸음을 떨쳐냈다. 이러다 길 한복판에 건전한 사내놈들이 쓰러져 뻗어 자는 건 아닐까.

조금은 엉뚱한 상상을 해보이며 야마토는 얼른 녀석을 집에 데려다줘야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걷고 있을 때였다. 어두운 밤거리를 약한 가로등 불빛으로 안내삼아 걷고 있던 그의 푸른 시선 안으로 잔잔한 주황빛 가로등보다 밝고 사나운 빛이 돌연 두 사람 앞에 나타나 서서히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 어두운 길거리에서 갑작스런 눈부신, 과한 빛에 반사적으로 미간을 찡그린 야마토는 이쪽으로 향해오는 한 물체에 의해 순간 당혹감 어린 눈동자가 곧 이어 날카로운 엔진소리를 울리며 위협적으로 다다르고 있는 관경을 마주하고 크게 흔들렸다.

심상치 않아. 아무리 시간이 늦은 시간이라 한들 충분히 사람이 다닐 만한 길거리였다. 아직까지 학교 사거리 안에 드는 도로에서 저렇게나 속도를 내고 있는 오토바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하다는 사고 밖에 떠오르지 않아서 야마토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경직된 몸을 억지로 움직여 옆에 서 있던 타이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생각할 겨를 따위는 없었다. 본능적으로 강하게 움켜잡은 그의 팔목을 있는 힘껏 잡아 끌어당겼다.

퍼억―!

‘?!’

강한 바람을 휘몰아치며 스쳐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에 놀라 어깨를 흠칫함과 동시에 제 팔목을 강하게 잡아당긴 힘에 이끌려 절로 안긴 품에 타이치는 어안이 벙벙했다. 오토바이가 있었다는 것도 한참 뒤에야 알아버려서 피할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눈을 크게 떠 보이며 놀란 여력이 가득한 시선으로 어깨 너머로 보이는 제 가방이 어쩌면 저 대신 처참히 내동댕이쳐져 있는 모습에 으으, 아연실색하고 몸이 떨렸다. 방금 전 자신들을 덮쳤던 불빛과 함께 빠르게 멀어져만 가는 오토바이를 바라봤다. 이게 무슨…. 아니 제 가방이 부딪쳐서 저기까지 날아가 있으면 저쪽도 당연히 부딪쳤다는 걸 알 텐데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뺑소니야 뭐야. 타이치는 마냥 혼란스러웠다.

집으로 귀가하는 하교 길. 집 방향이 서로 같아 하나가 아닌 둘이서 걷고 있는 거리는 어두운 시간임을 도드라지게 보여주듯 하늘은 검고 어두웠다. 시간 대 특유의 풍경에 타이치는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이겨내지 못한 채 몽롱하기 그지없었고 피곤함에 서서히 잠식되어가던 의식을 간신히 부여잡고 걷고 있던 타이치는 옆에서 계속 저를 깨워주는 야마토의 목소리에 간신히 버텨내고 있었다. 생전 이렇게나 잠에 겨운 기분에 빠져 또렷이 남아있는 정신으로 현재진행형으로 느껴지는 모든 감각들이 낯설고, 새로워 오늘 하루는 감당하기가 영 힘이 드네 하고 헛웃음을 내었던가.

가로등 불빛만이 길을 비추고 있는 거리 위로 거의 눈을 감고 설렁설렁 걷고 있던 타이치에게 야마토가 집에 가서 자라며 가볍게 훈계를 날려주어서 자신은 응이라고 답했다. 그 후 몇 분도 안돼서였을 거다.

눈을 감기 전에도, 감은 후에도 보이는 어둠 속에서 순간 퍼뜩하고 눈부신 빛이 나타났다. 손을 뻗어오는 수많은 잠의 유혹을 떨쳐내고 걷고 있는 다리를 멈춰 세우며 타이치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보이는 것이라 해도 여전히 길거리에 내려앉은 어둠뿐인 곳에서 왠지 모르게 흐릿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뿌연 시야 안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검은 물체가 어른거렸다. 방금 전 돌연 나타난 밝은 빛 또한 보였다.

사납게 울부짖는 엔진 소리, 고막에 부담이 갈 정도로 크게 울려 퍼지는 소음이 귀에 꽂혀 들어왔다. 부딪친다. 타이치의 두 눈동자가 뒤늦게 크게 떠 보이며 파도가 치듯 일렁거린다. 부딪친다. 몸에 기력 하나 없는 하필 컨디션이 바닥을 칠 때 갑자기 들이닥친 급박한 상황에 타이치는 떠오르는 생각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저 오토바이와 부딪친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것에 굳어버린 타이치가 흘러내리고 있던 가방끈을 기어코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 안에든 무게감에 푹 꺼지는 가방이 제 팔에서 떨어짐과 동시에 옴짝달싹 못하고 있던 타이치의 팔목이 잡히고 강하게 뒤로 끌어당겨졌다.

막을 새도 없이 몸이 틀어지고 기울어지는 제 몸뚱이가 얼마나 세게 당겼으면 충돌하듯이 잘도 퍽 소리가 들렸을 정도로 –퍽 소리가 나긴 했다. 정확히 제 가방 쪽에서- 푹 기대는 꼴에 이르렀다. 정신을 차리면 바로 앞에 기대고 있는 이가 또 너여서. 오토바이에 치일 뻔했다는 사실보다 놀라서 아니면 아까부터 쿵쾅되던 심장소리가 금방이라도 야마토에게 들릴 것만 같아 자연스럽게 몸을 떼어냈다.

‘……괜찮아?’

‘아…. 응, 덕분에.’

살짝 굳은 몸을 떼어내는 그에게 묻는 말에 작은 소리로 고맙다고 대답하는 타이치는 마주해오는 얼굴을 바라보다 힘겹게 입 꼬리를 올려 보이며 웃어 보였다. 굳이 그렇게 무리하면서까지 웃을 필요는 없는데. 야마토는 썩 마음에 내키지 않는 그의 억지스러운 미소에 핀잔을 주려다 이 상황에 꺼낼 말은 아닌 거 같아 그대로 꾹 눌러 담고는 조심스런 시선으로 타이치를 위 아래로 조용히 살펴봤다. 다행히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만이 피해를 본 듯했다.

아아― 내 가방. 곧바로 터져 나오는 당혹감이 물씬 묻어나는 목소리였지만 타이치는 저 나름대로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평소 모습 그대로를 가장해 장난스러운 말투까지 동원하며 제 가방 쪽으로 걸어가 들어 올려 보이고 있었다. 그 노력이 가상해 야마토 또한 거들기로 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래도 최악의 소매치기 범은 아니었는지 가방은 그대로 땅바닥에 뒹구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느냐는 말을 꺼내보였다. 생각지 못한 사고 아닌 사고에 다운된 분위기를 살려 보려 했으나 두 사람 모두 말은 그래도 힘껏 움츠린 모양새가 손쉽게 풀릴 거 같지는 않았다.

야마토는 야마토대로 자칫 조금이라도 자신이 뒤늦게 잡아당기지 않았었더라면, 타이치는 타이치대로 만약 야마토가 조금이라도 뒤늦게 자신을 당겨주지 않았더라면. 서로가 서로를 다른 시점으로 봤을 때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겨를도 없이, 두 사람은 바로 눈앞에서 아찔한 사고에 피해자로 이어질 뻔한 상황을 다시 한 번 자각해 보이다가도 동시에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두 사람은 고개를 저으며 기억 속에서 지워내려 애썼다.

‘그래도 뭐…. 응. 덕분에 잠은 싹 사라졌습니다.’

‘……넌 이런 상황에도 농담이 나오냐.’

불가 몇 초전에 큰 사고 당할 뻔했으면서도 잘도 그런 말이 나오는구나 싶은 야마토는 그럼에도 피식 터져 나온 웃음에 어쩔 수 없다는 미소를 지었다. 한편으로는 타이치다워서. 지나가는 여자들이 있었다면 필시 한 눈에 뻑 갈 정도로 화사한 얼굴로 웃고 있는 그 모습을 마주하며 타이치는 살짝 멍한 얼굴로, 그렇지만 사실인걸― 입술을 삐죽이며 한 마디 지지 않는 말은 꼭 남기고는 또 흘러내리지 않게 단단히 가방 끈을 그러쥐며 야마토가 있는 곳으로 발을 내딛으려 할 때였다.

돌연 훅하고 등 뒤쪽으로 고개를 돌린 타이치가 멈춰서있자 야마토는 의아하다는 시선으로 무언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는 타이치에게 질문했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착각인가 봐.’

방금 누가 우리를 보고 있었던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주변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거라고는 캄캄한 밤하늘 아래에서 잔잔히 빛을 내어 어두운 길을 비추고 있는 가로등과 그 사이로 보이는 길거리, 그리고 이 주변에 있는 사람은 야마토와 자신뿐이었다. 정말로 단순히 착각한 걸까. 방금 전 오토바이 일로 자신이 예민해지기라도 한 것일까 싶어 한숨을 내쉬는 저를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야마토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타이치는 얼른 손짓해보이며 재차 괜찮다고 대답했다.

‘…얼른 집에나 가자.’

‘그래.’

녀석의 어깨를 툭 치며 앞장서서 걸어가자 야마토가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휴―. 뭐냐 오늘…. 진짜 무슨 ‘야가미 타이치’ 운수 최악의 날 뭐 그런 건가. 유난히 아무렇지 않은 척을 내내 선보이는 거 같아 타이치는 기어이 잘 믿지도 않는 운수 같은 걸 생각해냈다. 거기다 저도 놀랐는데 야마토는 오죽했을까 오토바이가 지나간 후로 내내 보여주는, 걱정해주는 건 고마운 거긴 한데, 음… 역시 그런 표정은 보기가 좀 그렇달까. 걱정 가득 심란해하는 얼굴인데 미소라니.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 그런 얼굴은 한참 디지털월드를 처음 돌아다녔을 때 저희 중에서 가장 어렸던 친동생인 타케루한테나 보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뭔가 답지 않은 야마토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떠올리며 타이치는 또다시 제 심장 소리가 떨려옴을 느껴야만 했다. 아. 잊을 만하니 또 의식하고 있다. 하아….

그러고 보니 머리가 멍해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방금 전에 나 야마토한테…. 음― 으음……. 아니다, 생각하지 말자. 안 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퍼뜩 스쳐지나가면서 타이치는 사고를 제제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화악― 하고 올라오는 열기를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타이치는 무의식적으로 벌게진 제 얼굴을 들어 올린 손등으로 가려보이고 있었다.

아아, 정말이지. 서서히 온 몸을 지배하기 시작하는 화기에 타이치는 진심으로 지금이 가로등 불빛이 없다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고 차가운 바람이 조금씩 불어오는 겨울이라 크게 안도했다. 겨울에 불어오는 바람은 다소 뜨겁게 달궈진 타이치의 얼굴을 식혀주는 일에 한 몫 해주었기에. 이제는 감기 기운이라도 온 건가, 타이치는 메롱인 제 상태에 한숨만 팍팍 내쉬었다.

‘괜찮다는 녀석이 왜 계속 한숨이야.’

‘어? 어…. 그, 그러게.’

언제 옆으로 온 건지 대뜸 저 잘생긴 얼굴이 시야 안으로 확하고 들어오자 타이치는 헉 숨이 들어차는 바람에 그만 말을 더듬고 말았다. 이를 이상하다 여기고 점점 수상하다는 표정 그대로를 드러내 보이는 야마토의 얼굴을 슬쩍 피하며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 보이는 타이치를 지켜보고 있던 야마토는 결국 어깨를 들썩이며 반 포기한 반응을 보이더니 못마땅한 얼굴로 제 오른쪽 편에서 걷고 있던 발걸음을 돌려 왼쪽 편으로 자리를 옮겨 서보였다. 뜬금없는 그의 행동에 타이치가 한쪽 눈썹을 찡그리면 야마토는 기다렸다는 듯이 심드렁한 말투로 말한다.

‘네가 또 졸거나 넋 놓고 있다가 사고 날까봐 그런다.’

‘…….’

와, 저 뒤끝. 하기야 저 녀석이 누군데. 그 이시다 군이었지 참.

‘예예… 오늘만 맘대로 하시죠.’

‘…뭐야 김새게. 근데 오늘만?’

‘오늘은 이 이상 너 상대할 기력이 없어서.’

‘뭐냐 그거. 은근 걸리는데.’

말은 저래도 지금 타이치가 지쳐있고 피곤해한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야마토는 굳이 그 말을 늘고 물어지지는 않았더랬다. 야마토 성격이 그래서 지금만큼은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타이치였다. 실재로 거짓말도 아니었고. 입 밖으로 나오려는 한숨 대신 속으로만 심호흡을 해 보이며 마음을 추스르려 애쓴다.

‘아, 맞다.’

응? 그렇게 가는 도중에 갑자기 잊고 있었다며 옷 주머니에서 티켓 같아 보이는 것을 꺼내 넘겨주는 행동에 야마토가 건넨 티켓을 뒤로 돌려 확인해 보는 타이치는 저절로 입을 벙긋 열며 중얼거렸다. 아아, 전에 타케루도 그런 말을 하더니 바로 선 보인다는 게… 이거였구나. 티켓에 쓰여 있는 내용을 천천히 훑어보고 있던 갈색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어느새 제 앞에서 난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푸른 시선과 마주하자마자 미소 짓는 모습에 심장의 두근거림이 귓가에 들려오는 기분에 휩싸이며 굉장히 들뜬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리스마스이브 공연. 꼭 와라.’

‘아….’

‘대답.’

‘……응. 다른 얘들이랑 같이 갈게.’

다른 얘들? 무언가 허를 찌르는 듯한 대답에 야마토가 고개를 기울이며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그가 말하는 다른 얘들이라면 필시 소라들을 얘기하는 거 같은데 그게 맞는다면 조금 의아한 것이 야마토는 여러 가지로 준비할 게 많아서 다른 녀석들한테는 아직 공연한다는 얘기조차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요컨대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이브 날 공연하니 와달라고 처음 말 꺼낸 이가 바로 앞에 있는 이 녀석이란 소리다. 그의 물음에 타이치 역시 고개를 기울이며 도리어 아직 타케루한테 아무 말도 듣지 못했느냐고 반문했다.

타케루? 그의 입에서 갑자기 제 동생의 이름이 나오자 의아하기만 한 야마토는 제 외투 주머니에 두었던 휴대 전화를 혹시나 하는 마음에 꺼내들었다. 하얀 입김과 함께 찰나에 뿌연 시야 사이로 보이는 화면에는 역시나, 부재중 전화 목록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가자 제 동생의 이름이 버젓이 띄어져 있었다. 아 이런…. 설마 하는 마음에 아래로 더 내려가자 세상에 한두 번이 아니다. 점점 야마토의 얼굴이 퀭하고 어두워지자 타이치가 물음표를 띄우며 호기심에 고개를 내밀자 그의 휴대 전화 화면이 보인다.

‘와 대박.’

곧바로 이해한 듯 안쓰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타이치는 쌀쌀한 겨울바람에 얼어버린 거 마냥 굳어버린 그를 보며 전에 언뜻 들었던 말이 떠올라 냉큼 그 말 그대로를 입 밖으로 꺼내보였다.

‘타케루 화나면 엄청 무섭다고 히카리가 그랬는데―. 뭐… 힘내라.’

일순 터질 뻔한 웃음을 애써 눌러 담으며 쓰게 미소 짓고 응원하는 타이치를 야마토는 정말로 응원해주는 건지 불 난 집에 기름 붓는 짓을 하는 건지 긴가민가한 상태로 힘껏 노려볼 수밖에 없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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