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안 보여. 무거운 눈꺼풀로 계속 감겨지려는 추위와 졸음에 타이치는 스스로가 의식이 희미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구몬… 어디…. 그럼에도 네가 무사한지 알고 싶어서 타이치는 아찔한 감각 속에서 의식을 다잡으려고 해도 느껴지는 건 죽을 것만 같은 추위와 자신을 짓누르는 차가운 무게였다. 손 하나 까닥이지도 못하고 심지어는 제 몸뚱이가 무엇 하나 듣지 않아서 타이치는 지금 이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이 자신이 이내 죽을 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만 같아 두려워졌다.
사람은 죽음을 코앞에 둘 때 무의식적으로 살기 위해 수많은 기억들을 떠올리며 방법을 찾아내는 현상을 느낀다는 말을 불연 듯 떠올렸다. 하지만 그 이름이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의 진한 갈색이 색을 잃고 흐릿해진 눈 안으로 저를 향해 팔을 뻗으려고만 하는 아구몬의 모습을 겨우 잡아내었다. 어두컴컴한 시야 속에서 희미하게 움직이는 아구몬을 바라보는 시선이 금방이라도 꺼져갈 것만 같아 아구몬은 그토록 발악하며 울고 있었다. 얼음에 상당수가 먹혀 얼어붙은 몸은 이미 뭣 하나 정상이지 못해 타이치는 그 처절한 외침을 듣지 못했지만 희미하게 보이는 노란 형태가 아구몬이라는 것을 인식한 그는 그저 아구몬이 무사한 거 같아 보여서 뒤늦게 안도했다. 역시 본능적으로 품에 있던 아구몬을 밀어낸 건 잘한 일이었다. 알고 싶었던 것을 알고 나니 의식이 아득해져만 가는 것을 느끼며 타이치는 미소 지었다. 여전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감각이라고는 없는 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대로 그대로 멀어지는 의식 속에 이제 한계라며 무거워지는 눈꺼풀에 타이치는 버티지 못하고 받아 들였다.
아 생각났다. 타이치는 끊어지기 직전의 의식 속에서 떠오른 기억과 한 장면에 마음이 아려왔지만 눈물을 흘릴 새도 없이 툭하고 끊어진 그의 의식은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주마등처럼 떠오른 기억 속 한 장면에는 피에몬과 끝내는 돌아와 준 한 사람이 저에게 웃어주고 있었다.
-타이치이이―!!
안 돼. 눈을 감으면 안 돼. 눈을 떠 타이치. 안간힘을 써 보이며 빠져나오려는 아구몬이 타이치를 불렀다. 대답 없는 그가 쓰러져 있는 모습에 더 더욱 목이 터져라 부르는 아구몬의 목소리가 울려 퍼질 때, 모쟈몬과 유키다루몬에게 달려든 엔제몬과 테이르몬의 공격으로 눈 깜빡한 사이에 저 멀리 두 거대한 디지몬이 날아가 쓰러졌다. 제 몸을 누르고 있던 무게가 사라지자 아구몬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 타이치에게로 달려가려 했으나 그 때 저를 밀 춰 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찰나에 받았던 데미지로 인해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는 몸이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고 결국 그대로 빙판 위로 쓰러졌다.
-으…, 엔제몬! 테이르몬! 그 녀석들이 아니야!
아구몬의 몸 곳곳에는 날카로운 무언가에 스친 상처들로 가득했다. 눈보라가 일어나기 전, 타이치와 저를 습격해 온 녀석은 따로 있었다. 괴로운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리는 아구몬이 다급하게 외쳤다. 어째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만 했던 걸까. 아구몬은 방금 전 마주친 사악한 미소를 떠올렸다. 이를 악물며 소름끼칠 정도로 뻗어왔던 손을 기억해낸다. 처음부터 그 녀석은.
-조심해! 한 녀석이 더 있어―!
새하얀 배경 속에 숨어있던 녀석의 커다란 날개가 펼쳐지며 모습을 드러낸다. 입 꼬리가 찢어질 듯 올라가는 그 얼굴과 다시 한 번 마주하자 녀석이 속삭인다.
「아이시 샤워.」
엔제몬과 테이르몬이 돌아볼 틈도 없이 수많은 얼음의 화살들이 날개로부터 발사되어 둘에게 적중했다. 폭풍과도 같은 칼바람을 함께 불러일으키는 공격에 타케루와 히카리는 매서운 바람을 버텨내며 방금 전 일격으로 손수무책 쓰러져버린 파트너들을 맥없이 바라보았다. 강하다. 전신이 떨릴 만큼. 지금까지 만나왔던 디지몬들을 봤을 때 지금 저희들을 습격한 디지몬은 적어도 완전체 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성숙기인 채로는 힘들었다. 본능적으로 위험신호를 내고 있는 감각들이 그리 소리치고 있었다.
「느껴진다. 실로 흥미롭군.」
기분 나쁜 웃음소리, 귀가 아닌 머릿속으로 전해지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위협적으로 날개를 펄럭이며 내려오는 디지몬을 향해 경계해 보인다. 드디어 마주한 그 모습에,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을 기억해 낸 타케루의 미간이 절로 찡그러졌다. 과거 저희들을 죽이려 든 적과 같은 모습. 듣기 싫은 목소리까지. 단 한 가지, 색만 유난히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악마’를 노려보는 타케루의 시선이 분노로 일그러져갔다. 아구몬과 저희들을 습격하고, 타이치 형을 저 꼴로 만든 장본인이 틀림없다. 눈보라 때문에 보지 못했음에도 타케루는 확신했다. 자제심을 잃고 폭주했던 모쟈몬, 유키다루몬과는 전혀 다른 기운을 내뿜고 있는 모습이 그 증거다. 보나마나 앞서 나타났던 두 디지몬도 그저 도구로만 이용했을, 저 녀석이 하는 짓들이 전부 예전 제 소중한 파트너를 한 번 잃게 만든 디지몬과 곁 쳐 보일 정도로 너무나 빼닮아서 타케루는 주먹을 쥐며 치를 떨었다.
‘엔제몬!’
그의 외침이, 손에 쥐고 있던 D3의 힘을 실어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는 성스러운 빛이 엔제몬에게 닿았다. 진화의 빛이었다. 엔제몬에게는 실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문장 아니, 타케루가 가진 마음의 힘이었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힘이 커져가 그와 마음이 동화되는 순간, 힘이 솟아오르는 엔제몬은 거뜬히 자세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타케루의 빛이, 마음이 제게 말해온다, 우리의 희망으로 녀석을 해치우고 모두를 구하자고. 진화의 빛에서 빠른 속도로 빙판 위를 치닫고 달려드는 홀리엔제몬이 오른손의 엑스칼리버를 있는 힘껏 녀석에게 휘둘렀고 새하얀 악마는 미소 지었다.
‘됐―!!’
-큭!!!
「어리석긴.」
완전체 진화를 이루었다는 기쁨도 잠시 홀리엔제몬이 휘두른 공격이 치명타를 입힐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연 멈춰 서 물러섰다. 제게 달려든 상극의 천사가 제게 손도 못 되고 껄끄러운 빛 또한 사라지는 모습에 악마는 기분 좋게 비웃었다. 인간과 하나가 되어 강해지고 한 순간에 사라져버리는 힘 따위를 가진 자들을 새하얀 악마, 아이스 데비몬은 이토록 혐오하는지를 처음 알게 되었다. 눈앞에 마주한 절망에 가까운 표정들이 썩 마음에 들었으며 수중에 있는 축 늘어진 나약한 존재에 더욱 흥미가 생겨났다. 디지몬 보다 먼저 자신을 눈치 챈 인간. 그 한 순간, 죽일 수 있었음에도 죽이지 않은 자신. 무언가에 이끌려 이곳까지 오게 된 이유를 악마는 알아야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기대와 갈망에 아이스 데비몬은 잔인하게 웃고 있었다. 즐겁다. 그래, 그런 감정이 솟구친 것이다. 고작, 인간 하나를 손에 넣었다는 것에.
-윽, 타이치!
‘아… 제발, 그러지 마….’
‘뭐, 하려는 거야… 당장 형한테서 떨어져 데비몬!!’
빙판 위에 차갑게 쓰러져있던 그의 몸이 순식간에 녀석의 날개로 감싼 품에 있는 관경에 아구몬은 닿지 않는 손을 뻗었고, 홀리엔제몬으로 진화해 반격하는 때까지 주저앉아 있기만 한 히카리는 간청했으며 타케루는 돌연 무서워져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아이스 데비몬은 그들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굉장히 기뻐하며 새하얀 냉기 속으로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오직 나약한 자신들을 원망하라는 저주와도 같은 염원만을 남기고.
‘오빠!!!’
‘타이치 형!!’
-안 돼, 타이치!!
울부짖는 목소리에 악마는 희열한다. 서서히 자신의 공간으로 빠져드는 것을 느끼며 아이스 데비몬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타이치이이―!!’
코앞에서 우렁찬 울음소리와 날카로운 이빨을 벌려오는 형체가 푸른빛과 함께 덮쳐온다는 것을 아이스 데비몬은 끝내 알지 못했다. 아주 찰나였다, 그가 방심한 것도 남은 시간도 불과 몇 초도 안 되는 것만을 남기고 자신을 방해하러 온 것이 또 그 거슬리는 찬란한 빛이어서 악마는 화가 치밀었다.
무섭게 돌진해 이빨과 발톱으로 짓눌러 목덜미를 있는 힘껏 물어오는 가루루몬의 공격에 아이스 데비몬은 괴성을 지르며 본능적으로 발버둥 쳤다. 새하얀 냉기와 함께 제 모습을 완전히 감추지 못하고 금세 흩어져 사라진 흔적과 함께 사정없이 빙판 위로 곤두박질한 악마는 갑작스런 가루루몬의 등장에 물고 늘어지는 훼방꾼을 치워내기 위해 손을 움직이려는 찰나에 깨달았다. 지금, 저에게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타이치! 정신 좀 차려봐 타이치!’
‘타이치 형!’
‘오빠, 오빠…! 제발 눈 좀 떠 봐, 부탁이야!’
-타이치!
-히카리! 일단 이 얼음부터…!
가루루몬 너머로 보이는 관경에는 야마토를 비롯해 타케루와 히카리 그리고 아구몬과 테이르몬까지 단 한 사람을 걱정하며 에워싸고 있었다. 아이스 데비몬은 결국 이성을 잃고 울부짖었다. 방금 전까지 제 손안에 있던 것을 저들이 가지고 있어서,
「감히, 감히―!!!!」
왜 이토록 화가 치밀고 견딜 수가 없는 것인지. 아이스 데비몬은 그렇게 무엇하나 깨닫지 못하고 다가오는 홀리엔제몬의 공격으로 데이터화 되어 소멸되었다. 성스러운 디바이스와 D3에서 찬란하게 터져 나오는 진화의 빛이 사라질 때서야 크리스마스이브의 악몽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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