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시타이] 01.메이드
*공개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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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그래서요.”
불만 가득한 얼굴로 애써 침착하게 입 꼬리를 씰룩이며 무덤덤히 그에게 다시 물었다. 팔짱을 낀 채로 검은 오오라를 물씬 뿜어내고 있는 후배를. 한기가 서리는 주변 공기에 눌려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켜내 보이는 니시지마가 답지 않은 식은땀을 보일 만큼, 긴장해 보인다. 하하. 저, 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어, 어울려 야가미. 나쁘지 않아. 듣기에도 썩 어색하기만 웃음소리를 선두로 겨우 몇 마디 내뱉은 선배이자 선생님의 말에 타이치는 결국 참고 있던 이성의 끈을 끊음과 동시에 폭발했다.
“말리지 못했다고요? 미쳤어요?”
이런 꼴로 하라는 거잖아요. 건장한 사내놈한테 이 무슨 좆같은 경우가 다 있어. 아니, 물론 제가 그 중에서 가장 체격이 작긴 해도 이게 말이나 돼요? 워낙 경비가 삼엄하고 외부인 접근이 어려우니 남자인 제가 메이드로 가장해서 미리 내부인 인척 잠입해 있으라는 게, 지금.
죽음을 자초하는 게 아님 뭔데.
다른 곳도 아니고 저보다 훨씬 높은 직책을 가진 이들도 참석해 있는 공석에서 버럭 소리를 지르는 모양새가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 난 듯 했다. 그래, 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닌데 말이야. 이미 그의 의견 따위는 무시하고 일이 벌써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워낙에 갑작스런 일이다. 니시지마 역시 사전에 언급도 없이 제 앞에 있는 이가 제 동의 없이는 함부로 다른 일을 수행할 수가 없는 직속임에도 불구하고 멋대로 불려나갔을 때는. 지금 생각해봐도 참으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일이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후배를 찾아 상부 측에 직접 찾아가 방문하니 보이는 광경에, 니시지마는 아마 이 날 처음으로 늘 서글서글했던 미소를 지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곳에서 만난 이는 평소 저가 알고 있던 야가미 타이치가 아닌, 말 그대로 ‘하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야가미 타이치가 서 있었다. 본래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긴 갈색 머릿결 하며, 얼굴과 옷차림까지 전부. 이미 딴 사람이 되어 있는 상황이 처음에는 우습기만 했더랬다.
망할 간부 놈들. 언젠가 그 늙은이들 비리들을 파해 쳐서라도 처리하든가 해야지.
“선배, 듣고 있어요?!”
익숙하게 내리꽂는 그의 폭언에 귀를 틀어막는 니시지마는 노련한 한숨을 내어 쉬며 제 앞에서 씩씩 거리고 얼굴을 붉혀서까지 온갖 횡성수설을 버리고 있는 후배를 흘겨봤다. 누가 보면 다 큰 어른이 예쁘장한 여직원에게 훈계를 맞는 줄 알겠다고. 니시지마는 괜스레 울적해지는 제 처지에 한탄해 보였다. 나 나름 알아주는 직장 상사인데. 전에는 –정확히 2년 전까지만 해도- 선생님이었는데. 어쩌다 너와 내가 이리도 끈질긴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가 싶었다. 지금은 악연이다. 단언할 수 있다, 인연도 이런 인연이라면 차라리 없는 게 더 나았다는 것을. 그의 움직임에 따라 펄럭이는 치마소리에. 의식하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이끌림 속 빨려 들어가는 시선 끝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이외로 고문이다 여길 정도로. 니시지마는 지금 이 상황이 정말로 빌어먹게도 난감했다.
이, 일단 야가미. 아, 알았으니까. 흔들리는 제 목소리에도 죽어도 싫다고 박박 우겨대는 타이치를. 니시지마는 윽-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한동안 당황해하다가 화끈거리기 시작하는 얼굴에, 본능적으로 가려 보였다. 으으, 역시 더 이상은 안 될 거 같다. 그가 말한 그대로 정말 미칠 것만 같아서. 니시지마는 결국 머뭇거리고 있던 발을 성큼 옮겨 그에게 다가갔다. 모여 들다 못해 대놓고 흔치 않은 흥밋거리에 눈을 반짝이며 기분 나쁜 시선들로 타이치를 힐끔힐끔 거리고 쳐다보고 있는 동료들에게 만큼이라도. 지금 그 모습을 감추고 위해 니시지마는 제 마이를 손수 벗어 왁왁 거리고 있는 후배의 머리 위로 덮어주었다. 곧장 옷깃 사이로 마주해오는 갈색 눈동자를, 의아하다는 듯 흔들리는 그 시선을. 니시지마는 다소 곤란한 표정을 띠운 채, 나지막이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금속 탐지기가 저택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는 답사 보고는, 지랄 같은 지금 상황에서 더욱이 그를 비참하리만큼 무능하게만 만든다. 늙은이들 면상에 시원하게 욕지거리를 퍼부어주고 싶어도, 자신은 그 좁아터진 사무실에서 터무니없는 조건을 거리낌 없이 뱉어내는 것들을 귀에 쑤셔 넣어야만 했고. 제 후배를 위험한 곳에 내세우는 그들에게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가 경멸스럽고, 한심해서. 이번 임무 수행에서 철저한 위장을 취하도록 무기를 지참하지 말라는 윗선의 연락에 맨몸으로 있다시피 제 앞에 서 있는 타이치에게. 니시지마는 차마 변명조차 할 수 없어 한없이 조심스럽고 미안했다.
“아무 일, 없도록. 할 테니까.”
걱정 말라는 당신의 말이, 왜 그렇게도 슬프게 들렸나. 타이치는 일순 불같이 타오르던 불만과 분노가 깡그리 확 부어버린 차디찬 물에 홀딱 젖어 꺼져버린 불씨처럼. 식어버린 열기 뒤로 찾아온 무감각해짐에 그저 그가 하는 말들을 주어 담아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잃고 싶지 않다고. 너만은, 타이치 너만은. 반드시. 그러니까.
“날 믿고. 기다려.”
나는 그렇게, 오늘도 당신의 말에 순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