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디지몬] Dream

[야마타이] Dream .03

ㅁㅣ리내 2015. 12. 22. 16:30

21.03.23일 수정


 

 

“야가미? 아- 뭐라더라, 피곤하다고 교실 안에서 잔다고 했던 거 같은데?”

오후에 또 자습해야 하잖아. 그 사이에 눈 좀 붙이려나보지. 멀리서 제 이름을 불러대는 통에 금방 간다고 소리치는 친구를 보며 문뜩 떠오른 생각에 야마토는 살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예전부터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누구처럼 그리 친화력이나 사회성이 좋지만은 않았던 저였음을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웃음이 나왔다.

그와의 만남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동아리 시즌 시기에 찾아왔다. 소개 받았다며 찾아온 그는 순식간에 저와의 벽을 없애고 그 안에 싹을 트이고 인연이라는 꽃을 피우게 한 과정이 본인에게 있어 아직도 신기하다 여겨질 정도로 너무나 빠르고 일사처리로 진행되었기에 그 당시 정신없이 그가 내뱉는 말 하나하나를 주어 담느라 한 때 한 고생은 다 한 거 같다. 단순히 시간 때우기로 즐겨했던 음악과 노래를 그가 내뱉은 말 한 마디를 시작으로 더 나아가 제게 밴드라는 새로운 흥미와 열정을 알게 해주었던 게 화근이었는지, 그 이후에 이시다 야마토의 삶이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었다. 이를 자각한 지는 글쎄- 기억이 희미하다. 확실한 건, 만약 그가 저에게 찾아와 그 자리에서 ‘같이 밴드 부, 해 보지 않을래?’ 제안하지 않았다면. 단언컨대, 3년 동안 오다이바 중학교에서 같은 학급이 된 적이 없는 그와 마주칠 일도, 이렇게 대화할 일도 없었을 터였다.

“좋아하는 축구도 포기할 정도면 말 다했지.”

최근에 들어서는 사뭇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야마토는 동시에 미안함도 없지 않아 들었다. 새삼, 가깝게 지내는 몇 안 되는 동기 중에 같은 밴드 부 일원 중 하나가 그와 같은 반이라는 사실이 오늘따라 반갑게 느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 아, 그래. 알려줘서 고마워."

얼마나 피곤했으면 축구공만 보면 얼굴부터가 달라지는 녀석이 축구를 포기 하느냐고, 평소답지 않게 당황하며 그의 말을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물을 뻔한 야마토는 일순 멈춰 보였다. 그 녀석만 관련된 일이라면 평소의 신중함은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나오는 답은 하나뿐인지라 또 다시 입 꼬리가 올려가려는 것을 자제하며 바보가 다 됐다고, 한심하다 치부하는 야마토는 속으로 뱉지 못할 한숨을 삼켰다. 그 모습을 또 어떻게 이해한 건지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 야마토의 푸른 눈동자가 그에게로 향했다. 급히 가봐야 할 거 같은 친우가 발만 동동 굴리며 저를 바라-아니, 이럴 때는 노려보고 있다고 해야 하나- 보고만 있어, 왜 그러냐. 그런 무언의 시선을 보내자 끝내는 머뭇거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훤해서 야마토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뭐야?”

“별 건 아니고. 그…… 하아,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싸운 거야, 야마토?”

“……싸우긴.”

중얼거리듯, 머뭇거림을 보이는 그의 목소리가 곧 잔잔히 들려온 한숨 뒤로 상대방이 누구인지 굳이 말 할 필요도 없이 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밴드 부 친구의 말은 야마토가 머금고 있던 미소마저 차분하게 가라앉게 만들어주었다. 가벼운 호를 그리고 있는 그의 씁쓸한 미소에 역시 예민한 부분이었나 싶어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아 야마토의 어깨 위를 토닥이며 이제는 가봐야 한다며 등을 돌렸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행운을 빈다, 야마토.”

난 네 편이야, 인마. 그 말에 담긴 의미를 네가 이미 알고 있다면. 그리 기죽어 있지 말란 소리다 이거야. 푸스스 웃음이 세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야마토는 정말 늘 감탄했던 부분이기도 하지만 어쩜 이리도 감이 좋을 수 있는 걸까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진심으로 웃는 그를 보며 야마토를 따라 시원하게 웃어 보이는 그는 이제 됐다- 하며 고개까지 끄덕여 보이고는 만족한 얼굴로 교실로 가보라 하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최근 정말 소소하게 도움을 많이 주고 있는 고마운 녀석이었다. 여러 의미로.

이제는 3학년이라는 이유로 꾸준히 해 오던 밴드 부 활동도, 이를 빌미삼아 만날 수 있었던 팀원들과도 공부와 입시라는 장벽에 턱하니 막혀 실질적 거리가 생겨버렸지만 그래도 이렇게 금방 가까워질 수 있었기에 야마토는 안도했다.

“고맙다."

그럼 가보겠다, 너도 얼른 가봐라 하니 다음에 하루 날 잡아서 밴드 부 얘들이랑 제대로 모여서 놀자 하는 그에게 긍정의 답을 해주며 야마토는 발걸음을 옮겼다.

한적하다. 간간히 불어오는 봄바람소리와 함께 펄럭이는 커튼소리가 자연스럽게 물든 교실 안,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이 가져다 준 벚꽃 잎들이 창가와 그 부근에서 흩날리며 봄의 지욱들을 잔뜩 뽐내 보이고 있었다. 오늘따라 텅 비어있는 교실 안이 늘 시끄럽게 이리저리 뛰어 돌아다니던 학생들의 빈자리가 유난히 돋보이는 거 같다는 생각에 야마토는 도리어 어울리지 않을 거 같았던 교실 안 정적함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드르륵-. 익숙한 문소리를 배경삼아 야마토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교실 안으로 발을 더 딛는 그의 움직임이 하나하나 조용하고 조심스러웠다.

살랑살랑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과 똑딱거리는 시계바늘 소리뿐인 교실. 편안한 숙면을 취할 수 있는 분위기 속에서 타이치는 어깨를 들썩이며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 보이고 있었다. 어지간히 피곤했는지 보는 사람마저 맥없이 미소를 보일 정도로 그는 편안한 얼굴로 단잠에 빠져있었다. 깊은 잠에 빠져있는 그가 깨지 않도록 야마토는 조용히 타이치가 잠든 자리로 다가가 앞자리에 책상을 등지고 거꾸로 앉았다. 의자 등받이에 팔을 올린 채 턱을 괴며 제 앞에 엎드려 누워있는 풍성한 갈색을 눈에 담아내자 따뜻한 봄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감겨져있는 언제 한 번은 제법 긴 거 같다고 언급했던 속눈썹을 바라본다. 불편한 자세로도 책상 위에서 잘도 자는 그를 내려다보는 야마토의 입가에는 어느새 흐릿하게 호를 그리고 있었다.

“속 편해서 좋겠다, 타이치.”

나는 아닌데. 너는 이리도 편안한 얼굴로 잠에 들고 있는 모습인데 나만 괴로운 거냐며 야마토는 돌아오질 않을 질문을 삼키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태양처럼 따뜻하고 화사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타이치. 늘 주변에 함께하는 소중한 사람들 사이에서 모두를 이끌고 중심이 되어주는 타이치. 누구나 맘 편히 안심하고 의지하게 만드는 타이치. 우리들만의 그 여름 날 소중한 모험을 이끌어준 리더 타이치. 그 모두를 상상하고 떠올리며 머릿속으로 기억과 추억이라는 이름에 뿌리가 사방팔방으로 땅 아래로 곧고 광범위하게 퍼져나가듯 어느새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제 마음 깊은 곳까지 자리를 잡은 것들은 이제 ‘이시다 야마토’ 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커다란 버팀목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더랬다.

만약 그 여름날의 모험도, 타이치도 만나지 못했었더라면.

「……형?」

「어…… 어?」

「무슨 생각을 하기에 얼굴이 새하얘져? 어디 아파?」

안색이 갑자기 나빠진 제 형의 모습에 적지 않게 놀란 얼굴로 그리 물어오는 타케루의 물음에 야마토는 간신히 고개를 저으며 아무 일도 아니라고 우겨도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며 걱정하는 동생에게 겨우 웃어 보이고 나서야 넘길 수가 있었다.

「응? 뭐야, 뭐야? 타케루 왜 그러는데?」

「아, 타이치 형. 갑자기 우리 형이…」

「아무 일도 아니라니깐 그러네!」

돌아보는 갈색 눈동자를 마주하자마자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해 보이는 야마토가 옆에 있는 타케루에게 가볍게 헤드록을 걸며 저와 같은 색을 지닌 머리카락을 헤집고 있는 모습이 소위 사이좋은 -아악! 갑자기 뭐야 형! 소리 지르는 타케루를 보면 야마토가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거 같지만- 형제애를 실컷 보여주고 있는 야마토의 모습에 뭐 잘못 먹었냐는 인상으로 저를 보고 있는 녀석에게 야마토는 얼굴을 굳히고는 이상한 생각하지 마. 난 멀쩡하다. 그리 말했더니 일순 조용해진 복도 사이에서 그 두 사람은 금세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더라. 이것들이 사람이 진지하게 말했는데 웃고 지랄이야. 그때는 어찌어찌 화기애애한 두 사람의 분위기에 밀려 김 샌 듯이 본인도 세어 나오는 웃음에 마지못해 미소를 지었지만 야마토는 작년 악몽과도 같았던 크리스마스이브 날에 있었던 일을 계기로 그마저도 가벼이 넘길 수 없게 되었다. 가슴 한 구석이 무너지는 거 같다는 기분을, 야마토는 그 날 절실하게 온몸으로 느낀 탓이었다.

네가 내 옆에 있어주지 않았더라면. 처음부터… 디지털 세계에서의 모험 속에 자신 또는 타이치가 없었더라면. 지금 자신이 쥐고 있는 소중한 수많은 것들이 지금도 남아있었을까. 그 답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없었을 테지. 하나도. 남김없이.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사소한 행복마저도 없었을 것이었고, 자신은 그 어린 날에 그래왔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또다시 마음의 벽을 두고 다가서지 않으려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모든지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하려 드는, 꽉 막혀서 자신만 의지하는 그런 인간이 되었을지도. 그리되면 타케루 또한, 지금처럼 자주 만나지도 못했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서 실감했다. 그만큼 특별했음을 새삼 깨닫고 있으면 한 가지 자연스레 드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나라는 존재가 너에게 있어서는 대체 뭘까.”

소꿉친구? 그게 아니면 ‘디지몬’이라는 조금은 남들보다 특별한 경험을 함께 한 친구 또는 동료 정도일까. 야마토는 어느새 무거워진 제 눈꺼풀을 올려 보이며 슬픔, 두려움, 그리움, 그것도 아니면 간절함이 어린 시선으로 타이치의 모습을 천천히, 조심스럽게 담아내고 끌어안았다.

“타케루가 화내더라. 소라는 말할 필요 없는 거 알지.”

새근거리는 조용한 숨소리가 이어진다. 위로 아래로 잔잔히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어깨와 고요한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지금은 보이지 않는 포근한 갈색 눈동자를 떠올리는 그는 미소 지었다. 다행이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눈동자를 보지 못해서. 낯 뜨거울 거 같았고 여태껏 참아 눌러 담고 있던 것들이 그만 터질 것만 같아 씁쓸하게, 한편으로는 안도하면서 아쉬워하는 마음은 애써 또 모른 채. 눈을 찌르듯 덮고 있는 진한 갈색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는 손길에 묻어있는 다정함이 무색해질 정도로 몸을 뒤척인 타이치로 인해 아까보다 더 앞머리에 가려진 그를 보며 야마토는 소리 없는 웃음소리를 내보였다. 숨소리를 내는 너에게 부탁 하나 하자, 타이치.

“너도 아는 녀석이야, 나랑 같이 밴드 부 시작했던 녀석. 그 녀석도 좀 전에 묻더라고.”

그대로 가만히, 눈을 꼭 감고 있는 것처럼. 부디 애 같은 투정이 모두 들리지 않도록. 귀도 닫고 있어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