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디지몬] Dream

[야마타이] Dream .04

ㅁㅣ리내 2015. 12. 22. 16:41

21.03.23일 수정


 

 

 

「타이치.」

베리알 반데몬과의 마지막 전투까지 끝나고 나서도 더욱 커져버린 너와의 무언의 어긋남에 조급해하며 네가 가고 있던 길을 작정하고 막아 세웠던 그 날. 때마침 방과 후 시간이라 학생 대부분이 하교한 시점에서 한적한 복도 사이에 있는 두 사람만이 서로를 마주하여 서 있었던 그 시간을.

「……, 야마토.」

저와 마주하자마자 경직된 타이치의 얼굴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오늘은 정말 각오하고 그에게 따질 여력으로 말을 꺼내려던 야마토에게 뒤에 이어질 말들은 가히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자신은 잘 감추고, 잘 참고 있었다고 무심코 자신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그리도 놀라 당황해버려서 기어코 타이치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리는 짓을 하지 않았을 터였다.

「무슨 일 있었어?」

「…….」

적어도 작년 크리스마스이브 이전까지만 해도 내 앞에서 즐겁게 이야기하고 떠들며 웃었던 때까지는 너는 평소 내가 알고 있는 야가미 타이치였고, 지금까지 이어져야 했을 네 모습이었다. 근데 지금 이 꼴을 봐. 왜 우리가 이래야 하는 거야. 차라리 초등학교 때처럼 속 시원하게 소리 지르고 치고 박기를 하면 좀 좋아. 어색했던 그의 침묵이 이어가나 싶어 다시 물을 까 망설였는데 겨우 도리질을 하며 아니라는 제스처를 취하는 대답에 야마토는 치를 떨었다.

「그럼 왜 그러는 건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많이 억누르고 있구나. 그럼에도 야마토는 타이치에게 불만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듯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타이치는 타이치대로 그의 시린 눈동자를 애써 모른 채 하며 상면했다. 열릴 거 같지 않았던 입을 열어 타이치가 되물었다.

「너야말로.」

바라건대, 지금 제 목소리가 떨지 않고 평상시처럼 담담하게 들렸으면 했다. 평소처럼. 평소처럼 말하자. 자기암시를 걸며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입이 또 굳어버릴 거 같아서 타이치는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식은땀이 나올 것만 같았다.

「뭐?」

「답지 않게 왜 그러는데. 따지고 보면 나한테 할 말 있는 것도 네가 먼저 아니야?」

둘 다 말문이 턱하고 막히는 순간, 야마토는 이내 복잡한 심정으로 묵묵히 고개를 돌렸고 타이치는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부 활동 가봐야 한다며 틈을 봐서 빠져나갔다. 처음에는 그저 걸음걸이. 서서히 빨라지는 발걸음은 어느새 복도를 힘차게 뜀박질 하며 멀어지고 있었다. 야마토가 그곳에서 무엇 하나 받아들이지 못하고 겨우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건, 타이치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이후에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차라리 뻔뻔한 얼굴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른 얘들이랑은 잘 지냈으면 좀 좋아.”

처음에는 둘만의 이유모를 어긋남이 지금에 이르러서는 결과적으로 다른 아이들하고도 조금씩 어색함과 거리감이 생겨난 지금, 야마토는 분하기도 하고 이 모든 상황이 답답하기도 하고 여러모로 심란했다.

“…….”

야마토는 오랜만에 보는 그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어서 조금이나마 예전의 타이치 같아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음을 인정했다. 뜰 생각을 안 하는 타이치의 눈가를 응시한다. 야마토는 지금까지 잘 보지도 못한 것도 있고 이번 기회에 맘껏 감상하려다 가리라 마음먹었다. 디지몬 일도 그렇고 다른 일로 만나는 것도 있었지만 역시 매일같이 봐 왔던 얼굴을 계속 못 봤더니 상실감이 어지간해야 버티든 말든 할 텐데. 이제는 타이치의 얼굴마저 잊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아니라서 야마토는 더욱 쓰게만 느껴졌다.

“어쩔 수가 없네. 아직…까지는."

소라와 코시로가 제일 먼저 달려와서 설마 싸운 거냐고 또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큰 사단이 나 버린 거냐며 한 차례 아니, 연이어 윽박지르는 두 사람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떠올라 서글프게 웃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주를 넘어 몇 달 째 이어지니 눈치만 보다 곧 알아 서들 화해하겠지 싶었던 두 사람이 제일 먼저 이번 일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걸 눈치 채고 달려왔더랬지.

정확히는 어느 정도 저희들끼리 머리를 싸매고 고민도 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달려온 거였을 테지만. 최근 일주일에 두세 번 있는 체육 시간이 찾아 올 때마다 1층까지 다녀오는 길에서 간간히 막 입학한 미야코 하고도 만난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때마다 제 눈치를 살피는 걸 보면 어지간한 인물들은 다 알고 있는 거 같았지만 섣불리 움직이지도 못하다가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는 타이치와 저 사이에 흐르는 싸늘함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그들 중 대표로 선발 돼 소라와 코시로가 먼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야마토를 먼저 찾아온 것이라는 걸 그는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요는 당사자인 야마토 본인도 정리가 되질 않는데 타이치에게도 전하지 못한 걸 그 둘에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고, 침묵으로만 대응하자 두 사람 얼굴이 더 가관이었더라.

가만히 타이치를 바라보는 파란 눈동자가 감겨졌다. 코시로는 끝내 먼저 사과하라고 했지만 사과는커녕 말 걸 기회도 안 주는 녀석한테 무슨. 자신도 혼란스럽다 넌지시 말했더니 지금 그게 문제냐며 소라의 잔소리 같은 꾸중에 괜스레 그 때 느꼈던 감정들이 몰려와 야마토는 눈을 치켜뜨며 자고 있는 그를 한 번 째려보고는 무슨 소용일까 싶어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이쪽도 여러모로 고생중인 사람이었는데, 왜 자신한테만 뭐라 하는지. 처음에는 이것 또한 그의 대한 마이너스 감정에 한 몫 했었다. 그게 쌓이다 쌓여서 결국 그 상황들을 계속 피해버리거나 무심한 행동을 보여주었던 야마토는 어느 순간 그 두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곧바로 의아함이 들긴 했지만 그로서는 당장 방도가 없던 터라 금방 털어버리고 언제나처럼 교실 안으로 들어갔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줄곧 찝찝하게 자리 잡고 있던 의아함은 저가 자리에 털썩 앉자마자 다가온 같은 반 친구가 한 말로 말끔하게 사라져버렸다.

‘이시다. 옆 반에 타케노우치가 전하라던데.’

‘안 들어.’

‘엥? 뭐냐 너네. 작년에 둘이 사귀고 있는 거 아니냐는 소문이 퍼질 정도로 친했던 사이 아니었냐?’

‘……맞는데, 무슨 말인지 뻔해서 안 들어. 머리아파 저리가라.’

‘헹. 그래도 여자애한테 약속 받은 거라 안 되겠는데요― 이시다 군.’

이게 진짜. 낄낄되며 저를 놀리는 녀석에게 한 방 먹일까, 싶었던 야마토는 지끈거리는 제 머리를 감싸며 그냥 무시하기로 하고 넘겨버렸다. 또 보나마나 타이치 녀석 일이겠지. 이제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 한편이 심란해져서 가급적 마주하기도 망설이던 그로서는, 타이치와 관련된 일에도 얽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솔직히 조금은 존재했다. 일종의 현실도피였다. 수업 시작 전까지 잠이나 잘까 하다가 야마토가 더 이상 반응하질 않자 여태 것 장난스레 웃던 학급친구는 갑자기 웃음소리를 뚝 그치더니 사뭇 달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는데 그 말이 어쩐지 귀에 거슬렸다.

‘아 근데, 진짜 별일이야. 얼마 전까지도 쌩쌩하던 녀석이 갑자기 왜 그리 됐대.’

‘? 무슨 소리야?’

‘응? 뭐야 이시다. 아직 못 들은 거야? 야가미 말이야.’

야가미(八神). 적어도 오다이바 3년생에서 흔한 이름은 아니어서. 거기다 대화 흐름상 야가미라는 네임을 듣고 떠오르는 이가 단 한 사람뿐이어서. 야마토는 왜 갑자기 같은 학급 녀석의 입에서 타이치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인지, 또 이리도 거북한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지, 적어도 ‘지금 나는 아는데 너는 모르냐’는 어투가 심히 거슬린다 정도는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을지도.

‘타이치가 왜?’

갑자기 정색해 버리는 야마토의 변화에 어, 어… 그러니까. 말을 더듬거리며 당황해 하다가 뒷말을 이야기하는데 그 말을 듣고 야마토의 얼굴이 점점 새파래지고는 한 마디로 처절함 그 자체였다.

‘심한 감기몸살에 걸려서 삼일 전부터 학교도 못 나오고 있다던데? …진짜 못 들었어? 타케노우치가 이 말도 전하라고… 야! 이시다! 이제 곧 수업 시작할 텐데 어디가!’

몰랐어.

드르륵 탁―! 세게 열어젖힌 탓에 큰 소리가 나 교실 안에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저에게 쏠렸지만 야마토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한 자리가 비어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소라가 넋 놓고 서 있었고. 다른 아이들 보다 한참이나 뒤늦게 저가 온 것에 반응해 보였지만 고개는 다시 비어있는 타이치의 자리로 시선을 고정한 채 들려오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담담하기만 했지만 야마토는 알 수 있었다. 제법 울음기가 섞여 있는 그녀였다.

‘40도.’

‘소라.’

‘어제는 41도를 넘었대.’

최대한 참아 보이려 하지만 주먹을 쥐고 제 옷깃을 꽉 잡고 있는 그녀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야마토의 갑작스런 등장에 시끌시끌했던 교실 안이 일순 조용해졌다.

‘새벽에 응급실까지 갔는데,’

‘소라 잠깐만.’

‘오늘까지 열이 안 내리면 큰 병원에 입원한다고 들었어.’

‘소라!’

저도 모르게 소리치는 바람에 다시 반 아이들의 시선이 야마토에게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남녀 할 거 없이 그를 따가운, 일종의 미운 시선으로 노려보는 이들도 보였다- 마지막으로 문 앞에 있는 저를 마주해 오는 소라의 시선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흠뻑 젖어서는 여러 이름들의 감정들을 담아내고 있었다. 몇몇 반 아이들의 의아하지만 아니꼬운, 어딘가 따가운, 미운 듯한 시선과는 조금. 아니 많이 달랐다. 그 시선에 담겨진 것이 무엇인지. 타이치 못지않게 오랜 시간, 특별한 일들을 함께 해왔던 그녀였음에, 야마토는 이내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답 없는 자식들.’

적어도. 그녀는 그 말 말고도 꽤나 험한 욕을 내뱉고 싶었지 않았을까.

쿵―. 순간 무언가 깊이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희미해지지만 걷잡을 수 없는, 뒤로 가면 갈수록 울려 퍼지는 메아리처럼 끝없이 하지만 서서히 힘을 잃어가는 무언가가 눈이 내리던 그 날의 일을 떠올리게 해서. 야마토를 거세게 뒤흔들어 정신을 못 차릴 때, 마침 다음 수업을 맡은 과목 선생님의 등장으로 그 날은 어영부영 넘겨버리고 말았다.

한 번은 이제 그만하라며 나도 할 만큼 참았다는 반발심이 들었고, 또 한 번은 저 역시 어떻게든 해보려고 애썼고 노력했다 말한다. 나더러 어쩌라는 건데.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데 그냥 사과하라 하지만 그 녀석이 그런 껍데기뿐인 사과를 받아줄 거 같으냐고. 무턱대고 이유도 모른 채 미안하다고 한들 들을 녀석이겠느냐고. 그럴 일이었으면 진작 그 녀석이 먼저 찾아와서 뭐라 하고도 남았겠지―! 괜스레 울분 터져서 소리친 날에는, 저보다 더 어른스런 얼굴을 한 코시로가-야마토는 종종 그가 자신보다 한 살 어리다는 걸 새삼 자각하곤 했다- 고개를 돌려버린 소라 대신 담담히 제게 이리 물었었다. 그게 중요해요?

평소라면 당연한 거 아니냐고 답했을 간단한 물음이었다. 사과를 한다면 저가 정말로 잘못 한 것이 있음을 알고 받아들여서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전해야 하는 것이다.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에게도 당연한 도리 아니냐고 반박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이유는 코시로의 표정이 너무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무런 말조차 꺼낼 수 없게 만드는 안타까운 얼굴이었기에 그러했다. 어쩌면 가장 쉬우면서도 효과적으로 허를 찌르는 질문에 굳어버린 야마토는 입을 다물었고, 이를 기다렸다는 듯 코시로는 말을 이었다. 중요하긴 하죠. 근데 있잖아요, 야마토 씨.

‘계속 이대로 둔다면. 분명 후회하실 거예요. 그러지 않기를 저도 소라 씨도. 그리고 다른 이들도. 모두가 바라는 일이에요.’

야마토는 진심 어린 코시로의 말에 또다시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소중한 걸, 잃지 말아주세요. 예전처럼 저희를 아니 타이치 씨를 외면하지 마세요. 또 그 날 그 때처럼 혼자 내버려두면…. 이번에는 제가 가만 안 있어요. 충고가 아닌 경고입니다.’

그 때는 적어도 코시로가 전하고자 했던 말이 정확히 무슨 의미였는지를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알아, 타이치.”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사실을 그 한 마디에 뒤늦게라도 깨닫게 되어서. 금방이라도 으스러질 것처럼 너덜너덜 했던 무언가가 그 사실 하나만으로 위안이 된 덕분에 당분간은 쉽사리 부서질 거 같지가 않아서, 참 다행이라고 야마토는 쓰게 받아들이며 근근이 미소를 띤다. 한편으로는 좀 더 빨리 알았더라면, 지금 이토록 틀어지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아 들긴 해도 이미 흘러가 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야마토는 이보다 더 늦지 않음을 감사하게 여기기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으니깐.

“근데 이거 하나는 아직까지도 모르겠다, 타이치. 정말로 내가 뭘 잘못한 거라면…. 혼자서 끙끙 앓지 말고 말해. 고칠게.”

미안.

그냥… 모든 게 다 내가 늦게 알아서 생겨난 일 같아서 전하지 못하는 사과라도 하고 싶었어. 야마토는 한 동안은 깨어나지 않을 듯한 타이치의 모습에 아쉬움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봤다가 다시금 안도하는 제 모습에 기운이 빠져나가는 듯 했다. 괴롭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야마토는 뻐근한 고개를 들어 올리며 이제 슬슬 밖에 나가있던 이들이 들어올 시간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이제 얼마 안 남았네.

“갈게. 푹 쉬고, 일찍 자고. 그리고….”

조용히 의자 위에서 몸을 일으키며 야마토는 숨소리만이 들려오는 교실 안에서 끝내는 발걸음이 머뭇거리게 만드는 한 사람을 내려 보며 조금은 간절함을 담아 그에게 바랐다.

“그리고… 난 네가 이제 그만 좀 피했으면 좋겠다."

뭐, 저 역시 이전까지 피해 다녔던지라 뭔가 면목 없지만. 애초에 타이치가 자신을 피하는 이유를 알고 싶지도, 이해하기도 싫지만 남몰래 응원하고 지지해준 이들을 위해서라도… 아니, 날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이제 그만 끝내야하지 않겠느냐고. 야마토는 이제는 의미 없는 미소를 지우며 발걸음을 옮겨 교실 문 앞으로 걸어갔다.

이제 자신은 피할 생각도 그럴 마음도 아니니까. 문손잡이에 손을 가져다대며 은연한 미련함이 담긴 시선으로 책상 위에 누워있는 타이치를 바라본다. 단지 아주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나도 저 녀석도. 그러니 그때까지만 버텨보자며 스스로에게 마음을 추스르게 한 그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드르륵. 문을 여는 소리가 재차 닫히는 소리로 연결되고 교실 안은 적적함이 내려앉는다. 야마토는 이 날, 둘에게 필요한 것은 아주 조금의 시간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